돌아왔다. 싸늘한 찬바람이 부는 산꼭대기.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회색빛밖에는 찾아볼 수 없는 황량한 바위산들 뿐.
" 돌아왔군요. 자아. "
신공표... 그는 나를 이제 [태공망]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것은 내가 바란 일.
" 당신이 평생 거기에 머무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
"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야. "
그래. 여기. 지금 이 시간. 끔찍하지만... 당연한 현실. [거기]에는 내가 있을 곳은 없다. [나] 대신에 또 다른 [내]가 있다. 또 다른 [내]가 또 다른 [그]와 함께 웃고 있다.
" 아무튼 반갑군요. 어때요? 오랜만에. "
" ...그만두시지. 그럴 기분 아냐. "
신공표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고 보니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꽤나 새롭다. [그 때]의 녀석의 모습과 [지금]의 이 녀석의 모습 사이의 갭은 꽤나......이 녀석도 잠시 보고 올 걸 그랬나. 아무런 장식 없이 풀어 내린 백은색 머리카락. 조금은 소년에 가까웠던 그때의 모습보다 훨씬 성장한 모습. ...나와 비슷하게. 옛날의 광대 차림은 어디로 갔는지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옷차림. 지금 차림과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뇌공편을 허리에 차고 땅을 걷고 있는 모습. 흑점호는 없다. 지금 내게 사불상이 없는 것처럼.
" 하긴. 그렇죠. 예전처럼 억지로 덮.칠.수.도. 없는 일이구요. 당신은 이미 나와 맞먹는 선인이니까. "
" ...난 아직 도사야. "
" 당신에게 선인 칭호를 내려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 뿐. 이미 선인 이상 아닙니까? "
" 별로 그런 거 관심 없어. "
그래... 선인이건 도사건... ...인간이건.
" 상당히 감상적이 되었군요. 역시 과거의 여행은 상당한 자극이었나 보죠? "
" 감상적은 무슨. 난 원래대로야. "
" 내 말에 일일이 반응을 해 준다는 것이 그 증거죠. "
움찔......그런가.
" 얼마 전, 당신이 '태을진인이 만들다 만 그 시간이동용 보패를 사용해서 과거로 가보겠다'고 한 것이 319년 만의 대화였다는 거 알고 있습니까? "
" ...쓸데없는 걸 세고 다니는군. "
" 지루하다보니까 이런 것도 하게 되더군요. 보패는... 어라, 부서졌네요. "
난 그제야 힐끔 팔에 찬 브레이슬렛을 보았다. 처음보다 더 심하게, 마치 거미줄처럼 금이 간 붉은 보석이 박힌 금장식. [그 날]이 되기 얼마 전, 내가 태을에게 부탁했었던 보패. 탐탁찮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던 그는 결국 그것을 완성하지 못했다. 얼마 전 우연히 찾아냈던 이것이 그 때 부탁했던 그 미완성의 보패라는 것을 알고 한참을 고민했었다. 사용해봐야 하는가 어떤가. ...그리고 그 후 [그 때]의 [나]와 [그]는 어떻게 되었을지. 보고 있을 만한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냥 돌아와버렸다. 억지로 비틀어버린 시간은, 또 다른 미래를 그들에게 보여줄 수 있었는지. 그것은 이제 내가 알 바 아니지만.
" 버리는 겁니까? "
" 쓸모없어졌으니까. "
미련 없이 브레이슬렛을 빼어서 절벽 아래로 집어던졌다. 그리고 침묵. 고개를 들었다. 잿빛 하늘과 무수한 암석들. 이미 흔적조차 보이지 않지만, 이전에는 선인의 세계라 불리웠던 곳. 다시금 봐서인지, 잔상이 똑똑히 머릿속으로 그려진다.
...그것이 미칠 정도로 선명해서,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다. 손에 힘을 주었다. 타신편을 움켜쥔 손아귀에서 피가 흘러내려 바닥을 적시는 것이 느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저 곳은 예전, [그]가 있던 곳이다...
" !! "
무의식적으로 힘을 주었다. 기류가 거세게 몸부림치더니, 칼날 같은 바람이 육안으로 드러날 정도로 휘몰아치며 그 곳 을 박살내었다. 피어오르는 흙먼지. 돌덩이들이 시끄럽게 떨어지는 소리. 마치 폭풍 같은 소란이 끝난 후, 신공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 뭡니까 갑자기... 또 다시 발작인가요? "
" ...난 멀쩡해. "
" 아무리 그렇다해도, 보패도 쓰지 않고 그 정도의 힘을 사용하는 건, 당신이라도... "
" 상관없어. 이 정도. "
사실, 입 안에서 따뜻한 것이 차오르다 못해 입가로 흐르는 것이 느껴지지만, 상관없다. 지금이라도 할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부숴버리고 싶은데. 나 자신마저도.
" 뭐하는 겁니까 바보처럼... "
신공표가 가까이 다가왔다. 얼굴을 가까이 대더니 약간 허리를 숙여 내 입가에 흐른 피를 혀로 핥는다. 그의 태도에 제재를 가하지도, 반응을 하지도 않은 채, 나는 그냥 서 있을 뿐이었다.
" 이러다가 죽습니다. -당신은, 죽을 수 없잖아요? "
그의 말에 분노 이전에 흘러나오는 웃음. 그래. 죽을 수도 없어. 자살 따윈 말도 안 돼. 왜냐하면... [그]가 그렇게 바랬으니까.
인간의 몸에 이렇게 많은 피가 있었나... 하고 적잖이 놀랐다. 내 온 몸을 흠뻑 적시고도 바닥에 조그만 강을 이루는 새빨간 액체.
- 양... 전...
조심스럽게 그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이미 그의 왼쪽 가슴 아래가 관통되어 상반신의 절반은 사라져버렸다는 것을 무시한 채.
- 사숙...
대답이 들려왔다. 얼마나 기뻤던가.
- 무사... 하십니까...?
지금 자신이 남 걱정 할 때라고 생각하는 건지. 상황에 걸맞지 않게 웃음이 나와 버린다.
- 다행... 입니... 다...
얼굴을 들어 나를 바라본다. 원래부터 하얀 얼굴이 핏기를 잃어 마치 눈처럼 새하얗다.
- ...멍청이! 네가 지금 다른 사람 걱정할 때야!?
내 질책에 희미하게 웃음을 띄운다. 그 웃음에 오히려 불안해져버려, 나는 그의 입가에 흐른 피를 닦아내었다.
- 아, 그래. 어서 치료하지 않으면...
난 정말 어지간히 정신이 나갔었나보다. 이미 치유불가능인 상처라는 것을 뻔히 알고 있었으면서도, 이 어리석은 행동은 지금 생각해도 납득이 안 된다. 막 일어나려는 나를 제지한 것은 그였다. 힘없이 오른손을 뻗어 나를 끌어안으며,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 치료 따윈… 필요 없습니다...
- 무슨 바보 같은 소리야!? 이거 놔. 어서...
- 그 대신...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겠습...니까...
그의 말에, 나는 무슨 생각으로 고개를 끄덕였던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난 그 때, 그 붉은색에 홀려있었던 걸거다. 정신이 아찔할 정도로 세상을 붉게 물들인, 그 잔혹하리만치 아름다운 색깔에.
- 절대... 죽지 말아 주세요... 절대로... 끝까지... 살아남아... 주세요...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가 들은 것을 몇 천 년을 두고 후회하기 충분한 말이었는데. 당시의 나는, 그 말의 무게를 알지 못했지만.
- ...바보! 당연하잖아!! 내가 왜 죽는다는 거야!? 난 안 죽어! 그러니까 너도...
대응할 말을 못 찾고 바보같이 같은 말만 되풀이해대는 나를 바라보며, 뭐가 그리 즐거운 지 그는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 그래요... 당신에게는... 죽음 따위 어울리지 않아......
천천히 다가온 입술을 난 피할 생각 따위 하지 않았다. ...피 맛의 키스. 처음인데도 묘하게 익숙하다. 사람의 피란 이런 맛이 아닐 텐데. 구역질나는 쇳가루 느낌의, 그런 것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건 도대체 뭐지. 부드럽고, 그리고 멍해질 정도로 달콤한. 내가 몽롱해진 정신을 차린 것은, 그 찬란한 빛 때문이었을까. 그를 껴안은 손에서 느껴지는 따뜻함. 입술이 떨어지는 느낌에 살짝 눈을 떴을 때, 그는 그 만큼이나 아름다운 하얀 빛에 둘러싸 여 있었다. 몇 번이나 봤었지만 그때만큼 찬란하고 그때만큼 서글프리만치 아름다운 빛이 있었을까.
- 양... 전...!!
내 부름에, 그는 다시 희미하게 웃었다. 그런 식으로 웃지 마. 다시는 안 볼 사람에게 하는 마지막 인사 같은 그런 미소 따위 보고 싶은 게 아냐. 언제나 자신만만하던 너였잖아. 어째서... 어째서 나를 두고 가버리려는거야?! 난, 이렇게 약한데. 나 혼자서 뭐든지 할 수 있을 만큼 강하지 않단 말이야.
- 사숙...
그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 따라올 생각은... 하지 말아 주세요...
들리지 않아. 그딴 소리 들리지 않아!!
- 언제... 까지나... 당신을... 바라볼 테니까...
그렇게 희미해져버리지 말아줘. 네가 손에 잡히지 않아. 너만 바라보면 뭐해? 난 네가 보이지 않는단 말이야!!
- 언제까지나... 당신만을...
어디로 가려는 거야!? 이젠 네가 정말... 전혀 보이지 않아... 눈이 부셔서... 너무나... 눈이... 부셔서...
- 당신... 만... 을... ...사...
파아... 빛이 퍼지는 소리. 그리고... 약한 충격파. 눈을 뜨고 싶지 않다. 네가 사라져버린 내 앞을, 도대체 무슨 얼굴을 한 채 보라는 거지? 가버리지 마!!! 제발, 누가 저 하얀 빛을 붙잡아줘!!! 너마저 날 혼자 두는 거야!?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거야!?
- ...듣지 못했어... 제발, 난 그 말을 듣지 못했어!
- 돌아와... 제발... 돌아와... 신이든 악마든 좋아... 제발... 그를 돌려줘...
- 양전...!!!!!! 차라리 나도 데리고 가란 말이야-!!
" ...괜찮습니까? "
" ...... "
걷잡을 수 없이 다시금 밀려들어오는 기억들. 그런 생각 따윈 하는 게 아니었어. 봐- 전신에 힘이 풀려버렸잖아...
" ...이미 봉신대는 사라졌습니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셈이죠? 오지도 않을 사람을 언제까지나 기다릴 셈입니까? "
예전 같으면 화를 버럭 냈겠지만... 이제는 거기에조차 반응이 더디다. 그냥 별 반응 없이 잠시 예전 봉신대가 있던 곳을 바라보다가는, 다시 고개를 돌려버리는 나를 보며 신공표가 어깨를 으쓱했다.
" 당신은 점점 더 선인다워지는군요. 세상일에 무관심하고, 모든 것에 초연한. "
" ...난 그렇게 대단하지 않아. "
" 차라리 인간의 생활로 돌아간다면, 인간처럼 살아간다면 다시 인간의 수명을 가질 수 있을 텐데요. "
내가 왜?
"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으면서까지 지켜주려 했던 인간들의 사이로, 말입니다. "
" ...... "
아무 말 없이, 난 그를 노려보았다. 그가 살짝 미소를 짓는 것에는, 목덜미에 겨누어진 타신편의 효과도 어느 정도 있겠지. 인간들에게로 융화되고 싶었던 게 아니야. 나 역시 선도니까. 내가 인간들 틈에 낀다는 것은, -선도들이 없는 인간계를 만들 거야-라는 당초의 목적에 위배되지.
그래, 신공표 말대로 내가 양전을 잃으면서까지 행했던 일. 그것이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었는지, 나는 모른다. 단지, 거기에는 어느 정도 나의 유명세도 포함해서, 더 이상 인간계에 나서려는 선도는 없어졌다고 신공표에게 들었다.
...하긴, 선도의 숫자 자체조차도 아주 드물어졌지만.
" ...너야말로 왜 이렇게 내 옆에 붙어있는 거지? "
나의 질문에 신공표는 살짝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 당신이... 어디까지 갈 지 보고 싶어서...라고나 할까요? "
그는 웃으며 손을 뻗어 내 뺨을 감쌌다. 입술이 마주치고... 곧이어 입 안으로 따뜻한 무언가가 밀려들어왔다. 평소 같으면 아무 말 없이 내버려뒀겠지만...
" ...그만 둬. "
살짝 신공표를 밀쳐내고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싫다. 아직까지 입술에 남아있는 느낌. 몇 천 년 전의 키스. 아직까지도 아련히 맴도는 그 느낌을 덮어버리고 싶지 않다...
" 과거에서 그와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
그의 질문에... 순간적이나마 몸이 경직되었다. 알아채지 못했기를 바라지만... 그럴 리는 없겠지.
" ...있었지. "
" 이런, 시공을 초월해서 소원성취하신 겁니까? 그건 좀 변태적인데요. "
" 그럴지도 모르지. "
내가 수긍하자 약간 놀랐다는 미소를 짓는 신공표에게 결정타를 먹였다.
" 내가 덮쳤으니까. "
" ...... "
약간 놀란 정도가 아니라, 엄청나게 황당한 소릴 들었다는 얼굴로 눈을 크게 뜨는 그를 보 자, 실소가 터져 나왔다. 상당히 오랜만에 보는 표정이군. 그리고... 상당히 오랜만에 진심으로 웃어보는군.
" 그, 그러니까... 아니, 뭐 지금 모습이라면 아주 불가능한 것도 아니겠지만... 그래도... 그... 그럼 잠깐, 그러니까 그 때의 태공망은, 아니, 자아, 그러니까 당신은 뭐한 겁니까? "
" 완전히 내거라고 안심하고 있다가 생각지도 못한 장면을 보고 질투에 불타오르더군. 게다가 처음에는 그게 질투라고 인식조차 못하던데. "
" ...자기에 대한 말치고는 지나치게 비하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
" 사실이니까. "
그래. 사실이잖아...? 그래서 그렇게 떨리는 눈을 한거면서. 필사적으로 감추면서도, 별 수 없이 드러나는 그 눈 안에서 타오르는 불꽃. 나한테 감출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난 너인데.
" 귀엽던데. "
" ...위험한 소릴 하는군요. "
신공표가 살짝 미간을 찡그린 채로 다시 표정을 가다듬었다. 오랜만이다. 이런 아무렇지도 않은 기분으로 길게 대화를 하는 건. 역시... 신공표의 말대로 과거의 여행은 상당히 감상적인 기분을 씌워준 듯 했다. 마치 인간처럼.
" 혹시 그런 일을 예상하고서 힘을 키운 건 아니겠지요? "
신공표의 다분히 장난기 어린 말에 나는 피식 웃어버렸다.
" 설마. 단지 자기보호수단이었을 뿐이지. ...지금은 후회스럽지만. "
...차라리 그 때 죽어버렸다면... 자살이 아닌 채로... 네 곁으로 갈 수 있었을까...
" 네가 그 때 날 내버려뒀다면. "
" 좋았을 거라는 겁니까? 힘을 잃어버리고, 목숨을 걸고 지켜줬던 인간들 따위에게 집단으로 레이프 당하면서? 아니면 별 볼일 없는 요괴선인들에게 농락당하면서? "
하긴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그런 변태 녀석들에게 둘러싸여있다는 것은 싫었지만. ...이젠 별로 거기에 대한 느낌도 없다.
"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어. 누가 죽든 누가 살든... 내가 당하건 말건. "
" 그럼 지금이라도 지상으로 가보시죠. 당신 얼굴, 상당히 잘 팔릴 겁니다. "
옛날 같으면 버럭 화를 내고도 남을 말이지만 이제는 피식 쓴웃음이 나올 뿐이다. 얼어붙어버린 심장. 도대체 어떤 일이 있어야 이 굳어버린 마음이 움직여질까.
" 조금은 변했나싶더니... 역시 그대로인가요? [그]가 되살아나 당신 앞에라도 나타나는 기적이라도 일어나지 않는 이상, 당신을 바꾸기는 무린 것 같군요. "
" 기적...? "
그런 건 없어. 우연과 기적 따위는 없어. 세상일은 모두 누군가의 계획과 필요에 의해 일어나는 거야.
" 내가 인간들에게 당하고 있을 때도, 요괴선인들의 잔당에게 죽을 뻔 했을 때도, 날 구한 건 그가 아니라 너였지. "
" ...... "
" 세상에 기적 따위는 없어. "
그래... 바보 같은 일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이러고 있는 걸까... 그가 돌아와서 날 칭찬해줄 것도 아닌데... 왜 그런 바보 같은 말을 지키고 있는 거지... 넌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내게 그런 말을 한 거지? 너 없이, 혼자서라도 살아가라고? 죽지 말라고? 넌... 지금의 내가 살아있는 걸로 보여? 네가 다시 돌아온 다해도... 과연 날 알아볼 수 있을까? 네가 사랑하던 그 때의 나는 이제 없는데.
[나]는 그 때 이미 죽었어. [네]가 죽던 그 때. 이미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린거야.
" ...과연 그가, 이런 당신을 보며 기뻐할까요? "
" 후...... "
웃음이 나온다. 잠시 고조되었던 기분도, 이제는 다시금 천천히 가라앉고 있다. 여느 때와 같이.
" 아마 안 그러겠지. "
" 그럼 어째서 이러고 있는 겁니까? 당신은 그를 위해 지금까지 살아가고 있는 거 아닌 가요? 그렇다면 그가 기뻐할 수 있도록 살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
그를 위해서......아니야. 그런 이유가 아니야.
" 나를 위해서다. "
그래. 어디까지나 나를 위해서. 그의 마지막 약속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나 자신을 위안하고 있는 것뿐이야. 죽지도 않은 자신의, 처절한 몸부림에 대한 변명에 불과하다.
" 그리고... "
나는 웃었다. 웃고 있다지만, 신공표의 표정이 굳어지는 걸로 봐서는 상당히 어색한 표정인 것 같군.
" 그 녀석이 바라는 대로 해 줄 이유도, 그럴 마음도 없어. "
그래... 내가 무엇 때문에?
" 그 녀석도... 내가 바라는 대로 해주지 않았으니까... "
신공표의 표정이 완전히 굳어버린다. 조금은 질린 듯한 얼굴. 놀랐어? 난 이런 인간이야.
" 그러니까... 저 세상에서 마음껏 후회하라고 해. 자기 멋대로 지껄이고, 자기 멋대로 혼자 가버린 걸. "
" 자아... "
" 설령 기적이 일어난다고 해도, 이젠 나를 바꾸지 못해. "
그래... 네가... 돌아온다고 해도...
" 이미 내 안에서 죽어버렸으니까... [태공망]은. "
조그만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 잔인해졌군요... "
잔인...?
" 그럴지도. "
그 녀석에 비한다면... 멀었지만 말야. 이 넓은 세상 속에서 이 수많은 사람들 틈에서도 너만이 보이질 않아. 계속 잔상은 옆에 남아 내게 손을 뻗는데 다가만 가면 사라져버리지. 사막 속의 신기루처럼. 한여름의 환상처럼. ...악몽처럼.
얼마나 바랬던지... 네가 없는 이 현실이, 악몽이기를 바라며... 잠이 깨어 눈을 뜨면, 옆에서 웃고 있는 너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는. 하지만 그런 너의 미소를 보다가 다시 깨어나면 세상은 한밤중. 그리고 여전히 여기엔 나 혼자뿐.
몇 천 번, 몇 만 번, 몇 억 번의 낮과 밤을 지나도, 너의 환상이 사라지지를 않아. 도대체 몇 번이나 꿈을 꾸고, 몇 번이나 깨어나 울었는지, 이제는 눈물도 말라버려 나오지 않지만.
도대체 왜 미쳐버릴 수도 없는 거지? 왜 내게 그런 조그만 안식조차 허락하지 않아? 너 정말 날 사랑한 거 맞아? 그러고도 내게 그런 말을 한 거야? 혼.자.서. 살.아.남.으.라.고. 너야말로 잔인해... 지독하게 이기적이야. 지금의 날 탓할 수 없겠지? 네가 초래한 일이니까.
끝까지 살아남아서, 내가 어디까지 가는지 네게 보여줄 거야. 어디까지 무너져버릴 수 있는지, 언제나 미쳐버릴지. 그리고, 어디까지 널 미워할 수 있게 될지. 거기서 잘 보고 있어... 이제 [태공망]이라는 소년은 없다는 걸.
여기 있는 건 단지 산산이 부서져버린 마음을 가진, 냉혹한 선인 하나뿐. 스스로 자초한 일이라며, 마음껏 후회해. 후회하고... 후회하고... 결국은 마음을 닫아버려. 나처럼. 그때야말로 이 몸은 죽을 수 있겠지. 이미 혼은 죽어버렸으니까. 이제는 이 육신도 스러져버릴 수 있겠지. 그리고 그 때야말로... 이 끔찍한 마녀들의 밤(Walpurgis Night)의... 악몽의... 끝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