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네 탓이야. "
" 응? 뭐가? "
아주 잘~ 잔 듯, 혈색 좋고 밝아 보이는 세현과는 달리, 태공망은 축처진 어깨를 늘어뜨리며 한숨을 쉬었다.
" 젠장, 결국 한숨도 못 잤잖아... "
" 그게 내 탓? "
" 그래! "
소리를 버럭 지르자 세현은 어깨를 으쓱했다.
" 내 탓이건 네 탓이건... 잠 못 잔건 사실 같네. 조금 쉬고 오는 게 어때? 잠이나 조금 더 자두던지. "
" 안 돼... 일이 엄청 밀려있다구... "
" 조금쯤은 내가 봐주지. "
" ...... "
" 왜? "
" 뭘 꾸미는 거야? "
세현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빙긋 웃었다.
" 뭐야, 그렇게 못 미더워? "
" ...나라서 못 미덥다고 말하기는 좀 그렇군. "
" 이런이런... 나도 아무에게나 자원봉사 하는 건 아니니까. 일단 넌 나잖아. 여기서 과로사라도 하면 난 어떻게 되겠어? "
" ...... "
태공망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더니 물었다.
" 만약에... "
" 응? "
" 만약에 네가 이 세계에 간섭을 해서, 네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른 방향으로 역사가 흘러간다면, 넌 어떻게 되는 거지? "
태공망의 말에 세현이 약간 놀란 얼굴을 했다. 처음으로 흐트러진 표정. 그 반응에 오히려 태공망 쪽이 당황할 정도였다. 덕분에 태공망은 더 이상 질문할 타이밍을 놓쳐버린채 가만히 그의 대답만을 기다릴 수 밖 에 없었다.
" ...내 현재는 변하지 않아. 하지만 네 미래는 변할 수 있지. "
" ...하? "
한참이 지난 후에 나온 말은, 지나치리만치 형이상학적. 태공망의 얼빠진 표정에 다시금 원래의 포커페이스 미소로 돌아온 세현이 살짝 그의 머리를 쳤다.
" 내가 이런 말할 때 좀 쉬어두라구. 나도 언제까지나 매달려 줄 것도 아니니까. 얘기는... 나중으로 미루자구. "
태공망은 인상을 찡그리더니 더 이상의 질문을 체념했다.
" ...하아. 그래그래. 관두자. "
사실 묻고 싶은 건 태산 같지만... 물어선 안 될 것 같기에 그는 몸을 빙글 돌렸다.
" 어디 가 있을 거야? "
" 글쎄... 뒤뜰에라도 가 있을까. "
" 그래. 그럼 한숨 자 둬. 나중에 부를 테니까. "
" 오래 안 있을 거니까, 한 30분 정도 지나면 부르러 와. "
문이 닫히고, 세현은 엷게 떠오른 미소를 지운 채 탁자 위에 멋대로 흐트러진 죽간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 ...... "
익숙하게 하나하나 처리해나가던 세현의 귀에 들려오는 노크소리.
" 실례합니다. 사... 세현 씨? "
있으리라 생각한 사람 대신 조금 마주치기 난감한 사람을 본 양전이 화들짝 놀라는 것을 보며 세현이 쿡쿡 웃었다.
" 드디어 프로포즈라도 하러 온 거야? "
" 그, 그런 게... "
" 그라면 여기 없어. ...뒤뜰에서 자고라도 있겠지. 가 봐. "
" 아, 예... 감사합니다. "
양전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을 닫았다. 긴 갈색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꼬며 세현이 중얼거렸다.
" 자... 어쩔 거지? "
복숭아나무 그늘 아래 한 소년이 상반신을 기댄 채 앉아있었다. 창백한 안색이 너무 안스러워보여, 양전은 무의식적으로 그 하얀 뺨에 손을 가져갔다.
" 으음......양전? "
" 아... 깨셨습니까. 죄송합니다. "
" 아니... 세현에게 듣고 온 거야? "
" 예. 여기 계실 거라고 해서. "
" 참... 쉬라고 한 게 누군데. "
태공망이 살짝 투덜거리며 팔을 쭉 뻗었다.
" 그런데, 무슨 일이야? "
" 예? "
" 나한테 무슨 볼일이냐구. "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눈동자에 적잖이 당황한 양전이 말끝을 흐렸다.
" 저기... "
우물거리는 양전을 보며 태공망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 뭐야, 왜 그래? "
휙 고개를 돌려 표정을 가다듬은 양전이 다시금 태공망을 바라보며 웃었다. 철저한 연기훈련(?)으로 다듬어진 표정관리.
" 사숙, 혹시 좋아하는 사람 있습니까? "
" 하아? "
멍한 얼굴의 태공망에게 양전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다시 물었다.
" 친구나 뭐 그런 걸로 말고, 좋아하는 사람 있으시냐구요. "
" 뭐야... 왜 그런 걸 물어? "
" 아아. 어떤 여선이 제게 묻던걸요. 당신에 대한 걸. "
" ...여선이 나에 대한 걸 너에게 묻더라고? 뭔가 바뀐 것 같은데. "
" 암튼, 대답 부탁드립니다. "
표정이야 흐트러짐 없이 밝았지만 속으로는 조마조마해 미칠 지경이었다. 별로 그런 것 같지는 않았지만, 혹시나 저 입에서 다른 사람의 이름이 나온다면. ...왠지 모르게 살계(殺戒)를 범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버리는 양전이었다.
" ...그런 거, 없어. "
예상했던 대답. 살짝 붉어진 얼굴을 찡그리며 홱 고개를 돌리는 태공망을 바라보며 양전은 안심 반, 서운 함 반이 섞인 듯한 기분을 맛보며 피식 웃었다.
- 자아에게 말해줘... 너무 늦기 전에...
무슨 의민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순간 굉장히 초조했다. 정말로 지금이 지나면, 두 번 다시 이 사람을 못 볼 것만 같은 느낌에.
- 혹시 놀라더라도... 모른척하더라도... 그는 널... 싫어하지 않으니까...
그 말을 그대로 믿고 있는 자신이 의아했지만, 그런 불확실한 말에라도 매달리고 싶었다. 한 마디만. 지금은 그 후의 일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 ...그리고 그런 거 만들 마음도 없어. "
단칼에 자르는 듯한 차가운 말투. 순간적으로 정신이 든 양전이 눈을 크게 뜬 채 태공망을 보았다.
" 이런 일을 하고 있으면서, 연애 같은데 마음 쏟을 정신은 없어. 그런 거 별로 반갑지도 않고. "
" ...... "
순식간에 들뜬 기분이 찬물을 끼얹은 듯 가라앉는다.
" 그 여선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혹시 그런 거라면 네가 적당히 둘러대 줘. "
" 그래도... 괜찮으십니까...? "
양전의 말에, 태공망은 조금은 화가 난 듯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 나라면 당연히 괜찮아. 뭐, 아마 그 여선도 네게 그냥 말붙일 구실을 만들었던 것뿐이겠지. 아무튼 난 그런데 관심 없어. ㅡ관심가질 여유 따위 없어. "
단호한 어조에 잠시 굳어있던 양전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 가냘픈 소년의 어디서 이런 조금은 무섭다 싶을 정도의 집념이 있는 건지.
" ...고백하기도 전에 채인 건가. "
" 응? 뭐라고 했어? "
" 아. 아닙니다. 그럼 전 이만 물러가죠. 편히 쉬세요. "
양전은 가볍게 허리를 숙이고는 물러났다. 등 뒤에서 태공망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뒤를 돌아볼 수는 없었다. 자신의 표정이 어떨지 도저히 상상이 안 갔기 때문에.
" ...그래서, 그냥 왔단 말이야? "
" 예에... "
어이가 없어진 세현이 한숨을 쉬었다.
" 하지만 별 수 없죠. 사숙은... 지금 피곤한 것 같고. 제가 신경을 어지럽힐 수는 없잖습니까. 뭐... 시간이야 많으니까요. 싸움이 끝난 후에라도... "
" 지금이 아니면...! "
" 예? "
뭐라 말하려던 세현이 입을 틀어막았다.
" 세현씨? "
양전의 의아한 얼굴에 세현은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 ...됐어. 그런데, 내게 온 이유는 뭐야? "
" 예? "
" 실연이라면 실연당한 사람답게 구석에 처박혀서 검은 사선이나 내리긋고 주위에 유령이라도 몇 마리 띄우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니야? "
" ...그런가요... "
양전이 잠시 벙한 표정을 짓더니 다시 쓰게 웃었다. (삽질하는 작가..;;)
" 그냥... 당신을 보고 싶었습니다. "
" ...무슨 의미? "
" 에.. 그러니까... 의미라기보다는... 음..... "
스스로 말해놓고도 고개를 갸웃거리는 양전을 보며 세현은 쓴웃음밖에 나오지 않는 것을 느꼈다. 당황스러운 것은 양전도 마찬가지. 어째서 이 사람을 만나고 싶은 건지.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는 사람인데. 단지 사숙과 닮아서인가? 그렇다고만 보기에는...
" 하하... 당신에게 위로받고 싶어서인가요? "
결국은 헛웃음을 지으며 말을 얼버무려버리는 양전. 세현은 쓰게 웃었다. 웃으며,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 ...그 말, 상당히 위험하다는 거 알고 있어? "
" 예에? ...뭐, 뭐하는 겁니까? "
눈을 크게 뜬 채 말을 더듬거리는 양전은 아랑곳없이 세현은 자신의 겉옷을 벗어 아무렇게나 집어던졌다. 얇아 보이는 옅은 주홍빛의 클로스 차림은 누군가를 떠올리게 한다.
" 저기...? "
세현은 모자마저도 벗어버리더니 머리를 묶은 장식물을 풀었다. 사르르르 흘러내리는 흑갈색의 머리카락이 마침 세현의 등 뒤 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휘말려 물결치듯 날린다. 그리고, 약간은 비웃음에 가까운 미소. 그 모습이 순간적으로 태공망과 겹쳐보여 양전은 얼어붙은 채 그냥 다가오는 세현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자신의 목에 가는 팔이 감긴다고 느낀 순간, 호흡이 멈추었다.
" 흡...!! "
처음 느낀 것은 싸늘함. 그리고 이어져 찾아오는 감각은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어울리는 부드러움. 당황을 넘어서 경악한 양전이 자신의 목을 끌어안고 있는 세현을 밀쳐내었다. ...아니, 내려고 했지만 의외로 그 가냘픈 몸은 쉽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처음부터 벌려져있던 입술 사이로 부드러운, 그러나 이질적인 것이 밀려들어왔다. 간단히 상대의 것을 찾아내어 감아올린다.
" 읍...... "
인정하기 싫긴 했지만 정신이 순간적으로 아득해질 정도로 감미로운 감각에 양전의 전신에 힘이 빠져나갔다.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목을 감은 세현의 팔이 살짝 풀려 그의 어깨를 밀어 넘어뜨렸다. 탁자에 상반신만이 눕혀진 묘한 포즈에 새빨개진 양전의 얼굴을 보며 세현은 살짝 미소 지었다. 이렇게... 예뻤구나... 하지만 말야. 이건 내 탓이 아니라구... 그러니까 조금은 자각해 봐.
" 뭐하는... 읍...!! "
잠깐 떨어져나갔던 입술이 다시금 막혀왔다. 옅은 복숭아 향기를 풍기는 부드러운 피부. 뺨을 간지럽히는 흑갈색 머리카락.
" 으음... "
자기도 모르게 양전은 팔을 뻗어 그의 허리를 감았다. 정말로 세게 쥐었다가는 부러질 것 같은 가느다란 몸. 양전의 머릿속에서는 이런 사람에게 덮쳐지고 있는 자신이란 도대체... 라는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망상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입 속의 움직임에 스스로 반응하고 있는 자신에 대한 혐오감. 그러나 그런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세현의 입술이 살짝 떨어져나갔다. 입술 사이로 살짝 늘어지는 백은색의 끈을 양전의 입술에 닿은 부분까지 가볍게 핥아나가 던 세현은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 그... 그만... 앗...!! "
하얀 목덜미를 깨물어 붉은 자국을 남긴 채, 어느새 풀어버린 상의 아래로 드러나는 가슴팍 까지 입술을 움직여나갔다. 가볍게 하반신을 쓰다듬고 있는 손의 움직임에 이미 몸은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지 오래였다.
" 하앗...!! "
그만둬야 한다는 이성의 판단에 몸은 따라주지 않았다. 그저, 세현의 움직임에 맞춰 반응해주며, 이 감각을 즐길 뿐.
" 웃... 그만... 사... 사숙...!! "
순간, 세현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그리고 자신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에 놀라, 양전 역시 경직되었다. 가슴팍에 묻었던 얼굴을 든 채 양전을 바라보고 있는 세현의, 빛이 사라진 에메랄드의 눈동자. 절대로... 행위에 흥분하거나 즐거워하고 있는 표정이 아니다. 마치... 부서진 보석 같다는 생각이 든 순간, 세현의 몸에 힘이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양전이 재빨리 세현을 잡아당겼다.
" !! "
순식간에 뒤바뀐 위치. 한 손은 아까의 자세 그대로 세현의 허리를 껴안은 채, 나머지 한 손은 세현의 얼굴 바로 옆의 탁자를 짚어 몸을 지탱한 후, 간신히 호흡을 가다듬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공허한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세현을 보며, 양전은 왠지 울화가 치밀었다.
" 뭘... 무슨 생각을 한 겁니까? "
" 아무 것도... "
세현이 피식 웃었다.
" 아무 것도... 라니! 아무 것도 아닌데 이런 짓을 한단 말입니까? "
" 싫었어? "
" 다, 당연하잖습니까!! "
" 그래? "
피식... 다 알고있다는듯한 그 웃음에 양전은 순간적으로 당황과 분노가 동시에 치밀어 올랐다.
" 도대체...!! "
" ㅡ쉿. "
양전의 말을 여전히 아랑곳하지 않으며, 그가 살짝 입술에 손가락을 댔다. 주변이 조용해지자, 그제서야 작게 울리는 소리. 점점 가까이 들려오는 그 소리가 약간 빠른 걸음의 발소리라는 것을 느끼는 순간, 양전은 앞으로 확 잡아채어졌다.
" 앗...!! "
세현은 양전의 목의 옷깃을 잡은 채, 자신에게 끌어당기고는 그대로 다시 입술을 맞물렸다. 다시금 뜻하지 않은 공격에 경직되어 잠시 굳어버린 양전의 귓가에, 요란하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이봐, 세현! 30분이 아니라 1시간은 지났... "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군지 인식하는 순간, 자신이 지금 어떤 자세로 있는지가 연달아 인식되었다.
" 사... "
황급히 상체를 일으키고 문 앞에 선 작은 소년을 바라보는 양전. 소년의 모습에는... 의외로 동요가 없었다. 단지 에메랄드의 눈동자가, 미미하게 흔들릴 뿐.
" ...실수했군. 아까 하던 얘기 마저 하고 싶으니까, 빨리 끝내고 와줬으면 해. "
낮고 침착한 목소리. 문이 닫히고, 발소리가 멀어지기까지 그대로 푸른 머리카락의 미청년은 굳어있을 수밖에 없었다.
" ...빨리 끝내라는데? "
자신의 아래에서 피식 웃음을 흘리는 세현을 바라보며, 양전은 자신의 목에 감겨오는 팔을 매섭게 뿌리쳤다.
" 지금 도대체 무슨 짓을...!!! "
" 글쎄... 강간 미수가 되려나? “
탁자 위에서 몸을 일으키며, 세현이 싸늘하게 웃었다.
" 누가 가해자고 누가 피해자인지 보는 사람은 이해하기 힘들었겠지만. "
" ㅡ!! "
양전의 팔이 들리더니 그대로 내리쳐졌다.
" ...안 때려? "
새하얀 뺨의 바로 옆에서 멈춘 손. 눈 하나 깜빡 않고, 가만히 양전을 똑바로 응시한 채, 맞을 뻔 한 상대는 가볍게 웃었다.
" ...당신이 사숙의 형만 아니었다면, 그렇게 닮지만 않았으면... 뺨 한 대 정도로는 안 끝났을 겁니다!!! "
말 끝나기가 무섭게 뛰쳐나가 문을 부서져라 닫아버리는 양전의 뒷모습을 보며, 세현은 그제야 벽에 등을 기대더니 그대로 허물어지듯 주저앉았다.
" ......이번 회에는 완전히 악역인가? 푸훗... "
자조적인 목소리가 넓은 방 안에 낮게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