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현은 없었다. 있는 거라고는 완벽하게 처리되어 단정하게 정리된 죽간뭉치들뿐. 일(?)이 끝나자마자 세현을 만나야겠다며 집무실로 달려가는 태공망에게 양전은 [그 때]의 사건 때문이라 생각하고 오해를 풀기 위해 열심히 설명했다. 결국 양전이 덮.쳐.진.거.라.는.거. 세현=태공망이라는 것을 알 리가 없는 양전이지만, 그의 설명에 태공망은 무의식적으로 그 비주얼에 세현 대신 자신이 겹쳐지는 망상을 지우기 위해 무던한 노력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더불어, 자신의 생각에 더더욱 확신이 서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의 말과, 그리고 비어버린 이 방 안을 보면서.
" 세현? 아, 아까 왔었어. "
" 지금 어딨어!? "
" 어딨냐니... 보패 고쳤다니까 가지고 가버렸지 뭐. 핫핫! 역시 난 대단해!! "
세현이 했다는 극찬을 늘어놓으며 자기도취에 빠져있는 태을을 팽개친 채, 태공망은 양전과 함께 타고 왔던 효천견에 올라탔다.
" 양전! 효천견 좀 빌려줘!! "
" 예? 저도 같이... "
" 아니, 넌 오지 마!! "
내 생각이 맞다면... 그는...
" 사숙!! "
영리한 효천견은 주인보다 발언권이 큰 사람을 잘 인식한 건지, 양전의 외침에 아랑곳없이 태공망을 태우고 날아가 버렸다. (...왠지 불쌍하군, 양전)
깍아지른듯한 절벽위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흐트러진 갈색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멋대로 날리는 것은 상관하지 않고, 창백한 안색으로 복숭아나무에 기대어 호흡을 고르고 있었다. 곤륜이 한 눈에 보이는 위치다. 그만큼 높고... 외진 곳이라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 [나]만의 비밀 장소. 또 다른 나와 처음 만난 곳.
" 흐음... 역시 영수도 없이 혼자서 올라오기는 조금 무리였나. " (문제 : 사불은 어디에 간 걸까요오~~)
세현이 쓴웃음을 지었다. 하긴, 지금 이렇게 지친 것은 그것 때문만은 아니지만.
" 과연 태을... 깜짝 놀랐잖아. "
자신을 붙잡고 누가 만든 거냐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 테크닉이나 응용기술같은 것이 너무 익숙하다며 한참 열변을 토해내는 태을을 간신히 떼어내고는 여기까지 왔으니... 당연하다. 이건 태을 자신이 만든 거니까. 하지만 아직은 미숙할 테니, 한번만 보고는 똑같은 건 다시 못 만들어낼거야. 그래서 보여준 거니까... 잠시 시전 해봤는데, 아직까지 조금 힘에 부친다.
시간이동이라는 건 상상외로, 아니 생각대로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하기 때문에, 사실 계속 지쳐있던 상태였다. 그리고 아직, 완전히 이 보패를 쓸 정도의 힘이 회복되려면 조금은 기다려야 했다.
" ...곧 올 텐데. 추궁당하면 할 말이 없잖아... "
" 이미 왔어. "
흠칫해서는 뒤를 돌아보았다. 역시 자기 자신의 기척이란 걸 느끼기는 무리인지. 효천견에서 가볍게 뛰어내린 태공망이 그에게 다가갔다.
" 영수도 없이 여기까지 오다니... 무슨 수를 쓴 거야? "
" ...뛰었는데? "
" ...... "
서로 마주보더니 한숨.
" 관두자. 영양가 없는 대화는. "
태공망은 고개를 젓더니 다시금 똑바로 세현을 바라보았다.
" 돌아갈 거야? 지금? "
세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 고쳐졌다니까, 당연히 돌아가야지. "
" ...도대체 뭐 하러 온 거야? "
" 말했잖아? 그냥 봐두고 싶었을 뿐이라고. "
" 그 말은, 너의 현재에서는 볼 수가 없다는 거야? "
목적어가 빠졌지만, 굳이 끼워 넣고 싶지는 않았다. 세현이 피식 웃었다.
" 글쎄...... "
그의 쓴웃음에, 의혹이 확신으로 변해간다.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은, 단순히 바람이 불었기 때문만은 아니리라.
" 나의... 미래는 뭐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렇게 변해버린거야!? "
" 내가 어떻길래? "
" 어떻냐구? 시종일관 만들어진 표정과 그런 얼어붙은 눈으로 사람들을 보면서, 심지어는 양전을 보면서조차! 넌 알고 있었지? 내 마음을, 그리고 너도 말했잖아! 나도 같다고. 그런데 뭐야? 그 눈은? 그게 좋아하는 사람을 보는 눈이야? "
세현이 웃었다. 태공망이 지적한, 그 만들어진 표정을 지으며.
" [나]의 양전이 아니잖아? 그건 [너]의 양전이니까. "
" 차이가 뭐야... "
" 너와 나는 같은 사람이지. 그래, 그건 분명해. 하지만 이미 같은 공간에 존재해버린 이상, 둘은 다른 사람인거야. 하나의 것을 공유할 수는 없어. "
웃음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오히려 그 전신에서 풍겨 나오는 냉랭한 느낌이 확실히 느껴지는 것은 왜인지.
" 여기에 있는 모든 것은, 내게 속하지 않아. 이것들은 모두 너의 것. 그러니 내가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볼 필요는 없겠지. 그럴 생각도 들지 않고. "
차가운 말투. 웃으면서 말하고 있지만, 알 수 있다. 저 사람은 자신이니까. 즐거워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분노하는 것도 아니야. 저건 이미 오래 전, 감정을 잃어버린 사람의 눈이다.
"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난 거야... 나의 미래는... "
자신이 저렇게 변해버릴 정도의 미래란, 도대체 어느 정도의 무게를 가지고 있는지. 창백하게 질려버린 태공망의 머리를 세현이 살짝 쓰다듬었다. 오랫동안 바람 속에 있어서인지 차가운 손. 하지만... 부드럽다...
" 말했잖아...? 나의 현재는 바뀌지 않지만... 너의 미래는 바뀔 수 있다고... "
" ...... "
태공망이 고개를 들었다.
" 지금 내가 과거에서 무슨 발악을 하든, 내가 돌아갈 곳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하지만 네가 앞으로 가야할 곳은 바뀌겠지. "
" 무슨... "
" 내가 간섭을 한 그 시점에서, 이미 너와 난 다른 사람이 된 거야. 나의 과거엔, 이런 일 이 없었고. 너의 미래엔, 내가 겪은 일과는 다른 것이 보이겠지. 더 나빠질지 더 좋아질지는 알 수 없지만... 이미 여기서 넌 나와는 다른 길을 걸어가게 되는 거야. "
태공망은 고개를 저었다. 그 차가운 에메랄드 그린의 눈동자가 조금은 부드럽게 변해있었다. ...하지만 이제 알 수 없었다. 저 눈이 무엇을 비추고 있는지. 아까까지만 해도 선명했는데. 이.제.는. 다.른. 사.람.이.니.까.
" 양전이 그러더군... 너만 있다면... 운명 따위 바꾸는 것은 일도 아니라나. "
" 너... 역시... 아까 그건 일부러... "
" 자의가 아주 없었던 건 아니니까, 화내도 돼. “
태공망이 약간 놀라며 그를 바라보자, 그가 빙긋 웃으며 검지 손가락을 자신의 입술 앞에 세웠다.
" 넌 이제 질리도록 할 수 있을 테니, 첫 키스 정도는 양보하라구. "
" 이, 이봐!!! "
그가 다시금 미소 짓더니, 살짝 태공망에게서 떨어졌다. 옅게 빛나고 있는 브레이슬렛. 그리고 서서히 하얀 빛에 둘러싸이는 세현. 마치.. 봉신되는 장면 같아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 하고 싶은 일을 뒤로 미루지 마. 말을 입 안으로 삼켜버리지 마. 행동하기 이전에 생각해야 하지만, 생각이 지나쳐 행동을 못 하는 건 바보짓이야. 네가 제일 잘 알고 있겠지만, 넌 자신의 일에는 둔하지? "
" 너... 너도 그렇잖아! "
태공망의 반박에 세현이 살짝 어깨를 움츠렸다. 언제나와 똑같은 미소로.
" 그래... 그래서 난 후회했어.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그렇겠지. "
" 세현... "
" 나는 너의 비뚤어진 미래. 꼭 네가 나처럼 되라는 법은 없으니까 걱정 마. 이미, 길은 어긋나기 시작했으니까. "
슬퍼진다. 자신에게 동정을 느낀다는 건 말도 안 되지만, 이미 그는... 내가 아니다. 아니... 동정보다는... 연민... 그리고... 안타까움. 차라리 붙잡고 싶었다. 여기에 남으라고, 붙잡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말한 다해도 듣지 않을 것은, 알 수 있었다.
" 오랜만에... 즐거운 꿈을 꾸었어. "
보패의 발동 시간이 무척 느렸다. 아주 천천히 하얀 빛에 휩싸여가며, 그는 변함없이 웃고 있었다.
" 또다시 꿈에서 깨어나면... 난 혼자지만... "
" 꿈... "
" 그래, 즐거운 꿈. 영원히 두 번 다시는 볼 수 없는 아름다운 환상... "
뺨에 흘러내리는 것은, 눈물인가? 아주 오랫동안 느껴본 적이 없어서 우는 법 따위는 잊은 줄 알았는데.
" ...왜 네가 우는 거야... "
세현이 쓴웃음을 지었다.
" 그래... 어쩌면 이쪽이 현실이고, 나는 또다시 기나긴 악몽 속으로 들어가는 건지도 모르지... 꿈을 꾼 건... 내가 아니라 너인지도... "
"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
" 꿈은 꿈일 뿐이야. 자고 일어나면, 기억조차 나지 않는... 그런 꿈을 꾼 거야. "
세현은 여전히 흰 빛이 돌고 있는 팔을 뻗어, 태공망의 이마에 살짝 갖다 댔다.
" ? 무슨... ...!! "
아찔했다. 순식간에 눈앞이 흐려지고, 머릿속이 빙빙 돈다.
" 뭐... 한거야...! "
힘겹게 짜내는 말에, 세현은 단지 그를 부축해 나무에 기대어 앉혀주었다.
" 꿈이라고 했잖아... 일어나면, 기억조차 나지 않는 그런 꿈... "
" 너 설마...!! "
" 울지 마. "
세현은 살짝 입술을 가져가, 그의 눈가에 흐른 눈물을 닦아주었다.
" 기분이 묘해진다구. 나 때문에 울고 있는 나를 보다니... "
" 세... "
" 시간 다 됐어. 난.... 이만 갈 테니까... "
이제는 말조차 나오지 않는다. 흰 빛에 휩싸여 사라져가는 그가 희미하게 보였다.
" 꿈은 꿈일 뿐이지... 네게는... 미래가 있으니까... "
이미 내가 아닌 나... 도대체, 무슨 말을 해 줄 수 있는 거지. 아무 것도 모르는 내가...
" 안녕. "
사라진다. 사라지는 그 순간조차 변함없는 미소. 거짓된 표정과 얼어붙은 눈동자, 그리고 굳어버린 마음. 넌... 정말... 살아있는 거니... 삶을 살고 있는 거니... 아니면... 죽지 못해 사는 거니... 그렇게... 되지는... 않을 거야...... 절대로... - 그래...... 그래야 해...
" 사숙! "
" 으, 으음... 어라? 양전? "
푸른 머리카락의 미청년이 걱정스런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자, 태공망은 팔을 쭉 뻗으며 몸을 일으켰다.
" 하암... 잘 잤다......근데 내가 왜 여기 있지? "
" 세현 씨 찾으러 가신 것 아닙니까? "
양전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는 태공망.
" 세현? 그게 누구야? "
" 에? 누구... 냐니... 사숙의 형님이잖습니까. "
" 형? 내 형이라고? 지금 무슨 소리야? "
말도 안 된다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태공망을 보며 양전은 당황해서는 되물었다.
" 서방에서 왔던 도사가 있었잖습니까. 사숙과 꼭 닮은. 강세현이라고... 사숙의 형님이 라고 하셨잖아요? "
" 분명히 강세현이라는 형이 있긴 했지만... 70년 전에 이미 죽었다고. 난 시신까지 확인 했단 말야! 그리고 그 형 나랑 별로 안 닮았었어! "
조금은 화가 난 얼굴로 말하는 태공망을 보며 양전은 혼란스러워졌다.
" 서, 설마... 사숙... "
" 왜? "
" 저기... 혹시... 제가... 고... 백한 건... 기억하십니까...? "
" 에? "
잠시 멍한 얼굴로 양전을 보다가 확 얼굴이 붉어지는 태공망.
" 이, 이런 때 무슨 소리 하는 거야! "
" 기억... 못하십니까? "
" 으윽... 기억해! 기억한다고!! 그걸 내 입으로 말해야겠냐!? "
반응에 감사하고 싶어지는 양전이었다.
" 그럼... 제가 왜 갑자기 고백했는지 원인이 기억나세요? "
" 에? 그게... "
그러고 보니.. 기억나지 않는다. 왜 그는 갑자기 그런 말을 한 거지? ...왜 나는 화가 났었던 거지? 그 전에 무슨 일이 있었지?
" 아얏...!! "
머리를 감싸 쥐었다. 쿡쿡 찌르는 듯한 아픔.
" 사, 사숙!! "
양전이 황급히 그를 부축했다.
" 꼭 기억하실 건 없습니다. 괜찮으세요? "
" 아야야... 왜 이러지? 이상하네... "
" 조금 쉬시는 게 낫겠습니다. 나중에 얘기하죠. "
양전은 효천견을 다시 불러들였다. 모든 것을 다 보고 있었던 그 영수는, 태공망에게 한번 짖더니 그에게 등을 돌렸다.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는 뜻일지도 모르지만, 지금의 태공망에게는 알 수 없는 일이다.
" ...... “
자신만의 비밀장소. 곤륜이 훤히 다 내려다보이는데다가 덤으로 맛있는 복숭아나무까지 하나. 늘 혼자만의 곳이었는데. 갑작스럽게 허전해 보인다. ...어째서?
" ...사숙!? "
양전이 화들짝 놀라며 태공망의 어깨를 잡았다.
" 왜, 왜 그래? 양전. "
" 어째서 우시는 겁니까? "
" 에? "
뺨에 가져간 손가락 사이로 다시금 따뜻한 액체가 굴러 떨어졌다.
" 어라...? 왜... 내가 울고 있지...? "
자꾸 눈물을 닦아내었지만 그것은 주체할 수도 없이 흘러내렸다.
" 어째서...... "
" 사숙... "
" 왜... 이렇게 슬픈 거야...... "
바람이 분다. 이질적인 바람이 불어와, 두 사람을 휘감고는 사라진다.
- 이미 너와 난... 다른 사람이니까......
누구의 말이었더라...? 묘하게 머릿속에 남아서 메아리친다. 환상처럼... 아스라한 누군가의 모습 너머로. 그것은... 꿈이었나...
- 나의 현재는 바뀌지 않지만, 너의 미래는 바뀔 수 있지...
누구...였더라...... 그 사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