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까부터 울려오는 벨 소리를 무시한 채 계속 검색 데이터를 건성으로 넘기며 태공망은 한숨을 쉬었다.
" 안 보이네... 하긴, 금오측 데이터가 적기는 하지만... "
어느새 사라진 벨 소리에는 신경쓰지 않고, 태공망은 다시 초기검색 부분으로 돌아가 살짝 얼굴선을 쓸어내렸다.
" 후우... 다시한번 더. "
- 무엇을 찾으시겠습니까? -
" 금... 아니, Destroyer들에 관한 데이터 중 푸른 머리카락의 인간형을 가진 군인, 정치가... 암튼, 일반시민 제외하고 전부 넘겨줘. "
Destroyer(디스트로이어)... 파괴자(破壞者). 중앙에서 결정하긴 했지만 별로 마음에 드는 호칭은 아니다. 차라리 우스갯소리로 퍼져버려 굳어진 [금오]라는 이름이 훨씬 낫지 않을까... 하고 태공망은 자문했다. 아득한 옛날의, 내용조차 알아보기 힘들정도로 낡았지만, 인간계를 두고 대립하던 두 세력에 관한 이야기를 기록한 책을 보고, 조금 비슷한 상황인가 싶어서 자신이 그냥 다른 사람에게 장난삼아 했던 얘기가 어느새 빠르게 퍼져나가 굳어져버렸다는 -심지어는 그 상대측 본인들에게까지- , 시시한 유래의 이름이긴 하지만... 무턱대고 상대를 파괴자라 몰아붙이는 것 보다는 낫지 않을까.
- 중복되는 데이터를 빼시겠습니까? -
" 아, 응. "
- 이미지가 있으시다면 제게 직접 보여주시는 편이 빠르리라 생각합니다만? -
" ...아니, 그건 좀... "
태공망은 눈 앞의 중앙 컴퓨터 - 태극부인에게 슬쩍 쓴웃음을 보냈다. 머릿 속의 정보를 넘겨주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까딱하다가는... [그 때]의 기억까지 전해져버릴 지도 모르니까. 컴퓨터에게 알려지는 거야 별 게 아니라지만, 태극부인과 직접적으로 링크되어있는 친우이자 부사령관 보현진인에게까지 전해져버리는 건 난감한 일이다.
- 어째서입니까?
" 아아~ 네가 알면 보현도 알아버리게 되잖아. "
" 내가 알면 안되는 일이야? " " 그거야 물론... 으아아악!? 보현? "
혀를 차며 대답하다가 혀를 깨물어버릴 뻔 했다. 기겁을 하며 뒤를 돌아본 태공망의 눈에 연푸른색의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가진 소년이 있었다.
쓸쓸한 얼굴로 고개를 숙여버리는 그를 보며 태공망은 속으로 절규할 수 밖에 없었다. 저 거대한 컴퓨터와 뇌에 직접적으로 링크되어 있는 주제에 인간의 몸으로 용량 오버는 커녕 잘도 그것을 컨트롤 하고 있는 이 천재소년의 또다른 특기는 바로 이것. 아무도 말릴 수가 없다는 제멋대로에 게으른 총사령관 태공망을 잡을 수 있는 유일하다시피한 자으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경외심을 품게 하는 부사령관 보현진인. 태공망은... 그것이 연기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번번히 넘어가야했지만, 이것만큼은 그 역시 양보할 수가 없었다... ...당연하지! 누가 그런 걸 다른 사람한테 말하냔 말야!! 남자에게.....으아아악!!!
" 그, 그런 거 아니야. 하하... 나중에 말하려고 했어. " " 뭔데? 지금 말해주면 안돼? " " 그게... " " ...보현. "
살짝 한숨섞인 말투.
" 어라? 옥정도 왔어? "
뒤에 서 있는 길다란, 정말로 땅에 끌릴 듯 긴 검은 빌로드같은 머리카락을 가진 미남자에게 태공망은 살았다는 듯 반가운 시선을 보냈지만, 정작 상대는 살짝 미간을 찌푸린채 다시금 한숨을 쉴 뿐이었다.
" 어라... 가 아니야. ...보현. 지금 태공망과 장난칠 때가 아닐텐데? " " 아, 그렇지. "
보현진인이 살풋이 웃었다.
" 망이, 금오와의 회의시간이 5분 남았어. 빨리 준비하지 않으면 지각할거야. " " 아, 그래. 그런... ....왜 그걸 지금 말해애!!!!!! "
휭하니 달려가는 그를 보며 보현이 생글거렸다.
" 그러니까 아까부터 무길이 계속 벨을 눌렀는걸. -결국 내가 마스터키로 열었지만. " " 안 들릴거라고 생각해. "
...아무리 그래도 45초가 늦는 것과 45분이 늦는 것은 조금 차이가 있지 않을까... 라고 중얼거리는 청년에게 금발남자는 손가락을 들이댔다. 테이블에 한쪽 다리를 얹은 멋.진. 포즈로. -_-;
" 이건 역시 네가 내 의상을 입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 " 그게 어째서 그렇게 되는 거야!? "
주변의 시선을 생각해서, 절규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이미 그의 포즈만으로도 회의장 내의 시선은 전부 이리로 쏠려있는 판이었다.
" 어지간히 하고 내려와라. 조공명. "
이마를 짚으며 어떻게 저걸 처리하나 고민중이던 청년과, 여전히 포즈를 취하고 있는 남자의 사이에 앉아있던 백금발의 남자가, 이제까지 지켜오던 침묵을 깨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마에 살짝 그어진 검은 상흔에서 약간의 연기... 같은 것이 피어오른다고 보인 것은 착각인가.
" 알았어. 알았다구. 역시 나라도 입고 왔어야 했어. " " ...... " " 이봐, 문중. 말로 하자구. 그 금편은 치우고. "
상석의 푸른 머리의 남자는 상관않겠다는 듯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비어있는 바로 옆 자리. 곤륜... 은하연방연합군의 총사령관이라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 곳.
아직 소년의 모습을 한 채로, 100만의 전연방군을 손 끝으로 부리는 최고책임자. 귀여운 입가에 걸리는 싸늘한 미소는 가히 한 부대를 공포에 떨 수 있게 한다는 거창한 소문에, 금오측에서는 그의 하얀 기함이 보이기만 하면 일찌감치 36계 줄행랑이 현명하다는 얘기까지 퍼져있어 난감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전적으로 우위에 서 있던 금오가 밀리기 시작한 것도 그가 사령관의 자리에 앉게 된 후.
" -늦어서 죄송합니다. "
정확히 1분. 문이 열리고, 하얀 모자와 검은 망토를 걸친 제복 차림의 소년이 들어왔다. 옆에는 호위대장으로 보이는 전체적으로 약간 화가 난듯한 느낌을 주는 강한 인상의 청년 한 명과 부사령관의 제복을 입은 생글거리는 연푸른색 머리카락의, 동년배로 보이는 소년 한 명이 따라오고 있었다. 이 쪽에 비해 평균연령 10살은 어려보이는...
" 은하연방연합군 총사령관, 태공망이라고 합니... "
소년의 말이 끝을 맺지 못하고 허공에 맴돌았다. 눈을 크게 뜬 채, 눈 앞의 푸른 머리의 청년을 바라볼 뿐.
" 망... 사령관님? "
보현의 속삭임에, 태공망이 움찔하더니 다시금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렇지만, 그 변화를 볼 수 있었던 곤륜의 간부들은 태공망 못지않게 놀란 얼굴로 그와 금오의 총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 소년에게 이렇게 눈에 띄게 격한 놀람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드물기 때문에.
" ...... " " ...왕자? "
그리고 마찬가지로, 앉아있는 채로 멍하니 소년만을 바라보고 있는 양전에게 옆에 앉아있던 부사령관 문중이 의아하단 얼굴로 그를 불렀다.
" 아... "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듯 양전은 가볍게 의자에서 일어나 오른손을 내밀었다.
" 만나서 반갑습니다. 금오-군의 총사령관, 양전이라고 합니다. " " ...금오... 인가요. " " 에에. 꽤나 괜찮은 호칭같아서. 따로 이름짓기도 귀찮고 해서 말이죠. -작명가 씨. " " 흐음. 작명비라도 받아야 하는 것 아닐까요? "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채, 가면의 미소를 짓고 있는 두 사람을 보며 안심 반 씁쓸함 반의 기분으로 각각의 보좌들은 자기 자리에 앉았다.
뭐... 대부분이 예상하고 있던 일이기는 했지만 진전이라고는 조금도 되지 않는 희의상황을 바라보며 태공망은 조그맣게 한숨을 쉬었다.
" -사령관? 왜 그래? 멍하니. " " 아, 아냐, 천화... "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며, 살짝 옆자리를 곁눈질하였다.
" !! "
눈이 마주쳐버렸다. 순간 굳어버려서 눈도 돌리지 못했는데, 고개를 돌려버린 것은 상대쪽이었다.
순간 조금... 기분이 나빠진 것은 왜일까.
" ...왕자. " " 아... 왜? " " 저 소년을, 알고 있기라도 한건가? "
문중의 물음에, 양전이 살짝 쓴웃음을 지었다.
" 아니... 조금. 잠깐 만났던 것 뿐이야. 설마 곤륜의 총사라고는... "
이 자리에 참가할 사람이라고 짐작했었다. 그래서 예정 시간보다 일찍 나와 아무리 주위를 살펴봐도, 그 소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기에 조금은 실망하고 있던 중이었다. 하지만... 바로 옆 자리에 앉을 사람이라고는...
" ...하지만 지금은 중요한 회의중이다. 사념은 삼가도록 해. " " 알고 있어. ...하지만, 글쎄... 이래서야 끝이 날까... "
태공망과 비슷한 생각을 하며, 턱을 괴고는 앞을 바라본 채 조심스레 묻는다.
" ...넌 괜찮은가? "
목적어가 없는 물음에, 문중은 여느때와 같은 조소를 띈 채 낮게 대답했다.
" 난 인.간.이.었.다. ...그것뿐이야. " " ...그런가. "
다른 사람이 듣는다면 이해하지 못할 문답을 마치고는, 양전은 싸늘하게 웃었다.
" 슬슬 조용해지는군. "
양전의 말대로, 장내는 점차 술렁거림을 거두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양 측의 수뇌부들이 이때까지 한 마디도 안하고 있다는 것의 부자연스러움을 눈치챈 사람들이 늘어갔기 때문에.
" 망이... 이제야 얘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은걸. " " 아아. 불평불만은 다 늘어놓은건가? 그래도 의외로 물건은 안 날아가는군. " " 사숙... 이 아니라 지금은 사령관이지, ...날아갈만한 물건 다 치우라고 한 건 당신 아닌가? " " 뭐, 흥분했다면 테이블을 집어던지는 근성쯤은 보여야지. " " ......그게 근성의 문제야? "
익숙한 듯 보현은 웃을 뿐이지만, 호위대장 황천화군은... 이마에 삐질 땀 한 방울을 흘린채 스승인 도덕진군에게 들었던 근성의 정의에 대해 상기해보아야만 했다.
" 저, 저어... 왕자님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
조용해진 군중 사이로,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 그러고보니... '
금오의 총사는 군 총사령관인 동시에 최고지배자 통천교주의 외아들, 즉 [왕자]라는 소문을 들은 기억이 났다.
" ...지금 현재 우리측이 점령하고 있는 구역은 은하계의 약 1할 가량. 그리고 연방군의 소속인 구역 약 7할. 나머지 2할은 자유지역입니다. "
평범하게, 다들 아는 얘기를 서론으로 꺼내며 양전은 살짝 미소지었다. 그 미소에 순간, 곤륜측, 아니 곤륜과 금오, 피아를 가리지 않고 9할 이상의 여군들이 상황을 잊은채 무의식적으로 신음을 토해내버렸다.
" 여기서 연방군 측에 제안하고 싶습니다. "
그가 고개를 돌리더니 태공망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 지금 현재 우리가 점령하고 있는 1할의 구역들에 대한 지배권과, 자유지역 2할에 대한 프리패스 권한, 그리고 우리들을 Destroyer(侵掠者)가 아닌 Settler(永住民)로 인정해 준다는 보장을 줄 수 있다면, 이 무익한 전쟁을 종결시켜보겠다고 말하겠습니다만. " " !!! "
갑작스런 결론에 태공망은 물론 곤륜 금오를 가릴 것 없이 전원이 눈을 크게 뜬 채 굳어버렸다.
' 곤란한데... '
보현진인은 가볍게 입술을 깨물었다.
제안은 분명 매력적이지만, 중앙에서는 틀림없이 이런저런 이유를 붙여가며 토를 달 것이다. -결국 자신들도 마땅한 해결책이 없으면서도. 아무리 태공망이 총사이자 곤륜 제 2의 권력가이긴 하지만 쉽게 YES라고 대답할 수는 없는 상황. 그렇다고 여기서 우물쭈물하며 '생각해보겠습니다' 따위의 말을 한다면, 이미 한 수 지고 들어가는 셈이 되어버린다. 이미 두뇌의 싸움이 되어버린 공간에서 그것은, 패배에 한걸음 다가가는 것이나 마찬가지.
' YES-라고 한다면 아마 현재 금오에 지배되어 있는 1할의 구역들과 2할의 자유지역 사람들에 대한 여론이 들끓겠지... 인도적이지 못하다며. 그렇다고 지금 NO-라고 한다면 나중에 왜 그런 제안을 수긍하지 못했느냐고 판단력 없다는 질책을 받을게 뻔해... 어느 대답을 하건, 책임추궁당하는 건 네 쪽이야, 망이. '
보현은 자신의 친우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묘하게 걱정이 되지 않는 것은 맹목에 가까운 신뢰때문일까.
" ...그것은 당신의 결정입니까 금오의 결정입니까? "
조금 시간이 지난 후, 태공망의 입에서 미소와 함께 흘러나온 물음. 양전의 대답이 없자, 그는 고개를 들었다.
"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보아하니, 그것은 당신만의 결정, 혹은 수뇌부들만의 결정인 듯 하군요. 즉, 부하들과 민중들에게는 아무 의사도 묻지 않았다는 것 같습니다만. "
태공망은 반박의 여유를 주지않고 연달아 말했다. ...양전을 바라보지 않은채.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 일방적인 명령에, 과연 금오 사람들 하나하나가 다 잘 따라줄까요? 당신들의 점령구역에서, 인간들이 불이익을 당하기라도 한다면 그것은 누구의 책임이 되는 것입니까? 대답을 한 저희입니까 결정을 한 당신들입니까? "
웃고는 있지만, 말투는 거의 추궁에 가깝다. 금오의 사람들도, 태공망의 말에 수긍하려는듯한 기미를 보이다가도 자신들의 우두머리를 바라보며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 미안하지만 당신의 제안에 지금 대답을 할 수는 없겠군요. YES와 NO 양쪽에 위험부담을 가지고 있는 선택기는 고르고 싶지 않습니다만. 다른 선택문은 없겠습니까? "
돌려 말하고는 결국은 되받아쳐버린다. -생각해보겠습니다-라는 말을, -당신들에게 생각할 시간을 드리죠-라는 말로 바꾸어버린채.
그리고 동시에, 수뇌부와 부하들 사이의 갈등을 야기시켰다.
양전은 살짝 쓴웃음을 지었다. 곤륜 측을 몰아붙이기 위한 수단으로 대화중에 생각해냈었던, 별로 공들이지 않은 작전이기는 하지만 (YES라고도 NO라고도 대답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으므로) 이런 식으로 카운터 펀치를 먹을 줄은 예상못했던 바다.
" ...... " " 무슨 표정이 그래? 목탁. " " 아니... 잘 이해가 안 가서요. 그 사령관님의 말. " " 풋... "
하늘빛 머리의 소년은 가볍게 웃었다.
" 이해 안 갈 만큼 대단한 건 아냐. 그 제안을 '조금 생각해 볼 시간을 주세요'라고 대답한 거니까. 단지, 말을 조금 바꾸어서, 상황이 상대에게도 적용되도록 해버린거지. '너희들은 열심히 생각해봐라. 우리[도] 생각해볼테니.' 라고. " " ...치사한 거 아닌가요? " " 전략이란 다 그런거야. "
하늘빛 머리의 소년은 웃으며 금발 소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 단지, 그런 생각을 그렇게 빨리 해낼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운거지. 망... 태공망이 곤륜... 연합군 최고의 모사 꾼이라 불린 이유는 그 순간적인 상황판단력의 뛰어남과... " " 뛰어남과? "
하늘빛 머리의 소년은 그로서는 드물게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삼켰다.
" 그 얘기는 조금 나중에. 그럼 계속 할까? 이번 건 특별할 건 없는 이야기긴 하지만. "